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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농악인 이모저모

    [포커스] 고창농악, 고창의 꽃으로 핀다
    • 작성일2023/05/02 11:13
    • 조회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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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재이며, 고창의 문화관광이다”

    무형문화재 고창농악은 지난 40여년간 고창의 농업문화 및 자긍심, 그리고 인구 유입이라는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는 일상이 되었던 고창농악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인 1985년, 오거리당산제 풍물패가 없어서 관내 14개 읍면에서 500여명이 오디션을 거쳐 23명의 명인을 찾아내면서 시작되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걸궁패의 활동이 있었으나 미신타파 운동으로 전통문화가 소멸, 고창 최초의 상쇠 박성근씨를 끝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고창농악 명인들은 박귀바위를 비롯해 김성대, 강성옥, 신재근, 신재진, 김홍술, 박성근, 김현재, 성기만, 임대은, 정호풍, 나덕봉, 임동안, 신두억, 신영찬씨가 ‘쇠’를, 황태봉, 이효도씨가 ‘징’을, 김홍식, 김홍집, 신봉섭, 신봉식, 김덕봉, 김만식씨가 ‘장구’, 이모질, 허칠성씨가 ‘소고’. 김동우씨가 ‘새납’, 허백수, 전성근씨가 ‘대포수’로 기록 되었다.

    이들은 1947년 제2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상쇠 박성근의 전북B팀이 특득상과 개인상을 수상해 전북팀 22명 가운데 고창사람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고창은 농악의 뿌리였다.

    이어서 다음 세대인 황규언, 정기환씨에게 장구와 쇠가락을 전수, 이명훈(전, 고창농악보존회장), 현재 구재연(53.사진) 회장에 이르고 있다.

    1985년에 창설된 고창농악은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을 비롯해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그리고 2000년 전북 무형문화재, 세계무형문화유산포럼 고창농악 사례발표 등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은 2000년에 폐교된 학천초등학교를 개축해 80여명 숙소를 비롯해 200석 실내 공연장, 300석 야외공연장, 풍물체험관 5실, 시청각실 등을 갖춰 전국 최고의 농악 산실을 만든 것.

    고창농악보존회는 구재연 회장을 비롯해 정기환, 이명훈 고문, 고광율 부회장, 이광휴 사무국장, 이승규, 김재만, 이종환, 김용연, 황치용, 이상영, 손두예 원로회원 등으로 구성됐다.

    고창농악의 후원에 심덕섭 군수를 비롯해 180여명이 이름을 올린 가운데 심 군수는 “농악 전수를 통해 20여 가정이 전입하는 등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며 “기숙사 건립 등 후생복지에도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농악전수교육을 통해 80여명의 회원이 문화재 공연을 비롯해 고창굿한마당, 대보름축제, 꽃대림축제, 기획공연, 초청공연, 고창농악 정리사업 등을 통해 고창 특유의 멋과 맛, 색깔을 현대화, 대중화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은 지난 방학에도 1주 간격으로 총8회에 걸쳐 500여명이 다녀가는 등 고창방문의 해에 전초기지가 됐다.

    전국의 대학에 풍물 동아리가 활동하면서 고창농악전수는 필수 코스.

    구 회장도 산업공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동아리활동을 통해 1992년부터 매년 방학 동안 고창에 머물면서 황규언, 이명훈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아 1999년 고창에 정착하게 됐다.

    1남1녀 장남인 그는 부모의 반대를 이겨내고, 동아리에서 만난 아내의 가정반대까지 무릅쓰며 외로운 외길을 선택, 지금은 고3 딸과 함께 행복 동아리를 꾸며 전국 최고의 농악 명인의 길을 걷고 있다.

    고창 초중고 현장학습과 14개 읍면에 농악단 운영, 전수관 교육 등을 통해 매년 1,000명 이상, 지금까지 수만명과 농악 인연을 맺은 그는 동료인 20여명의 이수자들의 삶의 터전에 몰두하며 코로나19 시기에도 명맥을 유지해 고창농악의 희망을 쏘고 있다./고창=안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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